백일백장. 20

[100-46] 윤심덕 2.

Gim-Jeongeun 2024. 12. 19. 10:42

100-46

 

윤심덕 2.

 

춘천사람들이라는 춘천시민의 신문에 20231022[춘천100년사] 한국 최초의 성악가 · ‘악단의 여왕윤심덕 춘천공립보통학교에 교원 재직이라는 기사이다. 윤심덕은 고등보통학교를 두 번이나 다녔다. 평양숭의여자중학교는 몇 년제이고 몇 살에 졸업을 했고,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는 언제 다녔다는 것인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08년 관립한성고등여학교로 개교했다고 한다. 위치는 현재 종로구 도렴동이라고 한다. 1910년에 종로구 재동으로 이전. 1911년 경운동으로 이전. 1923년에 다시 재동으로 이전하였다. 1945년 중구 정동으로 이전하였다. 1969년에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1971년에 중학교를 폐교 했다고 한다.

무시험 추첨제는 이른바 뺑뺑이다. 1979년 국민 학교 졸업생들부터 인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는 중학교는 못 갔지만 그때 시끌벅적했다. 뺑뺑이 돌리려 간다고 아이들이 신나 했다. 그리고 뺑뺑이를 기점으로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을 많이 했다. 그 전에는 중학교 가는 아이들이 반에 몇 명뿐이었지만 무시험 추첨제를 하고부터 중학교에 안가는 아이들이 몇 명 되지 않았다.

필자는 1967년생들과 함께 공부를 했고 19802월에 졸업을 했다. 필자와 같이 국민 학교 졸업한 아이들은 아주 가난한 집만 빼고 다 중학교를 갔다. 몇 명만 중학교를 못 간 것이다. 경기여자 중학교는 1988년 강남구 개포동으로 이전을 했다고 한다. 경기여자 중학교는 1988년에 생겼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윤심덕이는 몇 살까지 고등보통학교를 다니고 일본으로 유학을 23살에 갔다는 것인가.

춘천사람들 기사를 살펴보자. 윤심덕이 어려서 성격이 활발해 평양말로 왈녀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평양숭의여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 광혜여병원 의사 의 권고로 의사가 되기 위해 평양여보고를 졸업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사는 성격에 맞지 않아 서울로 가서 경성여보고 사범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평양여보고에서 의과가 있어서 의과를 공부했다는 말인가?

192054일자 매일신보》 「東京音樂校入學(입학) 된 됴션두부인내용은 알아보기 힘들다. 원문을 찾아 봐야 할 것 같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매일신보 192054일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내용을 대충 보면 아버지가 윤석호이고 평양에서 목사라고 하는 것 같다. 강원도 춘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바 금회 선발되어 경성에서 어쩌고 한다. 고등학교를 두 번이나 다녔으면 고등학교 졸업이 23살 같기도 한데 춘천에서 교사를 한지 몇 달이 안 되어 유학생에 선발되었다고 하는 것인가?

1920년 유학생 선발되었고, 1923년에 졸업하고 1926년 죽기 전까지 3년 동안 성악가로 활동을 했다는 것인가?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 가수 활동이 가능했나? 1980년대도 시골 사람들은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화상이라고 했다. 또 도시 사람들은 광대라고 천시를 했다. 그때 성악은 들어보지 못했다. 교회 찬송가 합창이 성악으로 발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춘천 시사편찬위윈회가 윤심덕을 춘천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기록을 했다. 1996년 발간한 춘천100년사에서 말이다. 춘천 100년사를 춘천 문화원이 관리를 한다. 현재 춘천시는 시사편찬위윈회가 해체된 상태라고 한다. 역사 날조하기 위해서 위원회를 만들었다 해체했다 한다.

앨범 <사의 찬미> 녹음 직후 찍은 윤심덕 최후의 사진, 앞에 앉은 사람이 윤심덕이고 뒤에 서 있는 사람은 그의 동생인 윤성덕이다. <<조선일보>>, 1926년 8월 13일 기사 편집. 윤심덕이 29살이라기에는 부인 티가 확난다. 앞전 사진과 다른 사람이다. 윤심적이도 여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