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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백장. 20

[100-5] 박정희가 민둥산을 푸르게 했다고?

100-5

 

박정희가 민둥산을 푸르게 했다고?

 

나무위키에 한국이 1950년대까지 경기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북특별자치도의 산들이 1,000m 이상의 산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민둥산이었다고 한다. 그 중 상당수는 산에서 관목 한 그루, 풀 한포기 찾아보기 힘든 사막에 가까울 정도로 상황이 매우 나빴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산이 헐벗어 민둥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 민둥산을 박정희가 산림녹화 사업으로 강산을 푸르게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흙집을 짓고 구들을 만들어 방을 만들었다. 연료는 나무다. 갈퀴나무로 밥을 해먹고 국을 끓여 먹었다. 50년대까지 민둥산이었으면 밥해 먹을 나무가 없어서 다 굶어 죽었다.

필자는 1960년대 중반에 태어났다. 70녀 대는 잘 기억하고 있다. 산이 푸르렀다. 필자의 시골은 산골이고 마을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뒤도 산이고 마을 앞에서 500미터 정도 들이 있고 그 들 건너에 내가 있었으며, 내를 건너면 또 가파른 산이 있다. 항상 푸르렀다. 필자는 80년에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인천으로 서울로 공장을 떠돌아 다녔다. 부산을 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간다. 인천과 서울을 갈 때는 기차를 탈 때도 있고 고속버스를 타기도 한다. 80년대는 고속버스나 기차가 느렸다. 길도 구불구불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창밖을 보면 온통 산이고 나무뿐이다.

70년대 필자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면 필자 시골 여기 저기 산에서 산판을 했다. 멀쩡한 나무를 베어내고 어린 나무를 줄을 맞추어 심었다. 민둥산에다 심은 것이 아니었다. 윗동네에 목재소도 있었다. 70년대 장작은 보기 힘들었다. 삭정이 즉 썩은 나무 주워다 군불 때거나 소죽 끓일 때 썼다. 밥은 갈퀴나무로 했다. 갈퀴나무를 부르르 때고 가마솥에서 눈물이 나면 불을 껐다가 한참 후 쌀이 다 부르면 뜸을 들여서 밥을 해 먹었다. 뜸을 들일 때 불을 세게 때면 누룽지가 많이 나왔다.

필자의 기억으로 7~80년대 우리강산은 푸르렀다.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민둥산을 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비가 많이 온다. 민둥산이면 산이 물에 젖어 다 물러져서 산사태가 수시로 나서 산이 사라져야 한다. 7~80년 대 산에서 나무를 해댔기 때문에 나무들은 영양분이 부족하다. 그래서 자라는 것도 더디었을 것이다. 60년대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울창해서 70녀 대에 산판을 할 정도로 자랐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가 집 지을 때 기둥으로 쓸 정도의 튼튼한 나무들이 많았다. 그 나무들을 베어다 목재소에서 사각으로 다듬어서 한옥 기와집 기둥으로 썼다. 우리나라 기와집은 1960년대 지은 것으로 필자는 본다.

일제강점기는 없었다. 6.25 전쟁도 없었다. 우리 강산을 언제나 푸르렀다. 그러므로 박정희가 산림녹화 사업을 해서 우리 강산을 푸르게 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사실이 아니다. 옛날 사진들에 우리 산이 민둥산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그렸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녹화 사업을 했다고 하려면 민둥산 그림이 필요했던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 즉 CG로 그린 것이다. CG는 1990년대 중반부터 그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서대문구 영천동과 청계천변 판잣집 등 CG로 그린 것들은 우리나라에서 그렸다면 1994년 이후에 그려졌다고 봐야 한다.

1969년도에 찍은 우리나라 대다수 산의 모습 [출처] [국립수목원] ep.2-2 수목원해설 프로그램❘작성자 희미 69년도에 우리나라 산이 저랬다고 한다. 70년대 푸른 산은 외국인가 보다

 

전국 산하 나무 84%는 박정희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