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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백백프로젝트

[100-063] 서울의 전차? 85.

100-063.

 

서울의 전차? 85.

 

PART 02 : 궤도와 바퀴는 사람들의 발이 되고 : 정거장 사이의 일상과 풍경 : 전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 천변풍경의 박태원을 이어서 살펴보자. 1930적멸, 수염을 발표할 시기에 헤밍웨이, 멘스필드 등 영미작가들의 최신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여 소개 했다고 한다. 박태원이 번역했다는 건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문단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6.25 전쟁 때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홀로 월북하였다고 한다. 월북 사유가 가장 미스테리한 작가라고 한다.

박태원 인물 사진을 보자. 상고바가지 머리에 안경을 쓰고 양복에 넥타이를 했다. 이 사진은 젊어 보이다. 6.25 전쟁 때라고 하는 1950년에 42살이다. 이 땅에 카메라가 들어온 것은 현실적으로 1950년대 후반이다. 1950년 이전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이 사진도 CG로 그런 것인가? 누가 모델인가. 박태원이 등장한 것은 1988년이다. 월북 작가라고 등장했다. 학교에서 작가와 작품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치다 보니 식상하기도 하다.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월북 작가라고 본다. 박태원은 실존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제강점기는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증조할아버지께서 30대 중반인 1894년에 작고 하셨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1928년에 46세의 나이로 필자의 아버지를 낳으셨다. 그때 어떻게 살았을까? 70년대와 초와 비슷하지만 호롱불은 있었을까? 논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땅에 직파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 어릴 때 벼인지 찹쌀이라고 했지만 직파를 했다. 직파는 금방 사라져 버렸다. 그 당시에 천변풍경 책을 낼 수도 없다.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1969년에 한지공장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한지도 이때 출현했다고 보인다. 1969년에 한지공장은 모든 것이 수작업이었다고 한다. 닥나무를 삶아서 껍질을 벗셔 섬유질을 만드는 과정이 있다. 나무껍질을 종이를 뜰 수 있게 곱게 다진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곱게 다녀서 엄청 큰 구세통에 풀어서 발로 왔다갔다 저으면 발에 얇은 막이 생긴다. 그렇게 수작업을 하다가 1971년 논을 담보로 삐다라는 기계를 들였다. 그 삐다가 닥나무 껍질을 곱게 갈아 준다. 10가마니 였다고 한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기계였다. 다음해 가을에 쌀 열가마니를 못 갚으니 담보 잡은 사람이 겨울에 그 논을 팔아 버렸다고 한다. 얄짤 없었다. 시골에서 정 있게 살았다고 필자는 기억하고 살았는데 파고 보니 살벌했다.

한지의 등장은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해 1971년에 발동기로 삐다를 돌렸다. 필자는 발동기도 1971년쯤에 이 땅에 들어왔지 싶다. 돈을 못 벌고 있는 논, 밭 다 날리고 알거지가 되었다. 투자비용에 비해 수입이 턱없이 부족했고 팔로도 없었다. 필자 아버지께서는 대전, 여수까지 종이를 팔로 다녔다. 필자 어머니도 곡성까지 종이를 팔러 가셨었다. 필자가 국민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머니 껌딱지여서 어디든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따라 다녔던 것 같다. 곡성에서 한지 팔고 섬진강 건너 송동인 외갓집으로 온 기억이 있다. 걸어 다녔었다. 섬진강이 모래였고 강바닥이 얕았다.

소년은, 드디어, 그렇게도 동경하여 마지않던 서울로 올라오고야 말았다.” 천변풍경1938년에 발표했다고 하는데 서울이 등장한다.

서울에 전차는 없었다. 전기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