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5
한지는 언제부터 생산하였을까?
한지가 처음 발명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중국의 채륜이라는 사람의 제지술이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개량되고 정착되었으리라 추정한다고 한다. 1931년에는 낙랑군의 묘지에서 한지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지가 종이인데 물이 닿으면 녹는데 실체도 없는 낙랑군 묘지에서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어이가 없다. 593년에 고구려에 제지법이 전해졌고, 610년에 고구려에서 담징이 제묵법과 제지법을 일본에 전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북쪽인데 삿뽀로 쪽으로 전했다고 해도 상당히 거리가 멀고 바다 인데 일본까지 갈 배가 610년에 있었다고 한다. 필자의 연구로 고구려는 없었다. 일본도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본다.
필자는 전기의 역사를 추적하다가 의문점이 생겼다. 필자의 시골은 1970년대 중반에 전기가 들어왔다.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한지공장을 운영하셨다. 듣기로는 처음에는 기계가 없이 전부 손으로 수작업을 했다고 한다. 닥나무를 초겨울에 밭에서 베어다 큰 가마솥에 삶는다. 충분히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나서 또 겉껍질을 벗겼다. 그것을 잿물에 넣고 방망이로 두드려 섬유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삐다’라는 기계를 설치했다. 삐다는 타원형에 긴 원통이었다. 통에 껍질 벗긴 닥을 양잿물과 함께 넣고 돌리면 섬유질이 된다. 그때 삐다를 뭘로 돌렸는지 궁금했다. 여기저기 전화해서 알아보았다. 그때는 발동기를 돌렸다고 한다. 그 다음 경운기 머리를 이용했다가 그 다음 전기로 했다고 한다. 필자 어릴 때는 전기가 아닌 석유기름으로 돌리는 발동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롱불을 석유로 피웠듯이 말이다.
필자의 추측이다. 한지는 1960년대 유행하기 시작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의 아버지는 많지 않은 논과 밭을 팔아서 한지공장을 시작했다. 할아버지 때부터나 그 윗대부터 한 가업이 아니었다. 필자의 시골은 좁다. 그 좁은 곳에서 적지 않은 논과 밭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 때문에 한지 공장을 시작해서 가세가 기울고 본인은 폐인이 되어 버렸을까? 한지공장 시작은 꼬임에 넘어 간 것으로 본다. 59년에 제지 공장이 시작되었으면, 벽지까지 양지가 나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60년대에 한지공장을 시작한 것은 멸망의 길로 스스로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필자 시골 동네에 한집도 아니고 세집이나 한지공장을 운영을 했었다.
우리나라는 무엇이 잘된다 싶거나 뭐가 유행하면 우르르 몰려 서로 망한다. 대형 공장 즉 제지 공장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도 호황을 누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한지 공장이 시작되어 산골까지 들어와 순박한 사람들 꼬셔서 한지 공장을 하게 되었을까? 한지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떠돌다 필자의 시골까지 흘러들어와 공장을 하게 부추겼을까?
필자의 어린 시절 기억에 종이 뜨는 사람을 채용을 했는데 열심히 일하겠다고 선불을 달라고 해서 주었더니 그 돈 받아서 도망가 버렸다. 필자의 어머니께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다. 종이도 안 팔리고 기술자는 가불 받아 도망 가버렸다.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협에서 대출받아 산 농기계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2013년 필자가 화풀이 다큐를 찍으면서 갑자기 농기계가 사라진 이유를 알았다. 농협에 사기를 당한 것이다. 영수증을 안 챙겨놔서 대출금을 다 갚고도 또 갚으라고 하는데 증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역겨운 농협이다. 정부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등처 먹으려고 만든 것이다. 초창기에는 그렇게 등처 먹다 1987년을 기점으로 법을 만들어 지금까지 등처 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