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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100장

[100-76] 백제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100- 76

 

백제 무령왕릉은 진짜인가?

 

무령왕릉은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백제 제25대 임금 무령왕의 무덤이라고 한다. 무령왕릉은 연화문(연꽃무늬) 벽돌로 아치를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으로 출토 된 유물로는 금관, 금은 장신구, 석수(돌짐승), 동자상, 청동거울, 도자기, 지석 등이 있다고 한다.

무령왕은 AD.462년에 태어나 501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523년 6월 7일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무령왕릉은 1971년에 최고이자 최악의 발굴이라는 명제아래 발굴되었다. 무령왕이 죽은 지 1,448년 후다. 하룻밤 만에 졸속으로 발굴을 했다고 한다.

필자가 무령왕릉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석 때문이었다. 가야사를 공부하던 필자가 신라에 지석이 많은 것을 보고 백제에는 어떤 지석들이 있고 어떤 언어들을 사용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 하나뿐이다. 그 지석내용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62세 계묘년 5월 임진일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 12일에 안장하여 大墓(대묘)에 올려 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이다.

영동대장군은 그 당시 양나라에서 받은 봉호라고 한다. 양나라는 502년에 세워진 나라고 554년에 멸망했다. 치세기간이 52년이다. 무령왕은 501년에 왕위에 올랐다. 양나라는 502년에 세워졌다. 그 당시 바다건너 양나라와 그렇게 긴밀하게 연락을 하고 살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이 기근에 시달리다 천여 명이 신라로 밥 얻어먹으러 왔다는 삼국사기 기록만큼 허황되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백제에서 자기 나라 왕을 예우해서 쓴 비석이 아니다. 우리는 뼛속까지 양나라 하인입니다 이다. 왕의 지석이고 백제에서 지석을 만들었다면, 어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언제 태어나서 언제 세자가 되었고 어느 날짜에 누구와 혼인하였으며 언제 왕이 되었고 아들은 몇 명을 두었고 언제 승하하셨다. 정도는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 지석이 하도 수상해서 백제 땅이라고 하는 충청도에 국립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원과 관련 논문을 쓴 선생님들에게 문의했다. 중국의 왕흥지 지석을 모방했다고 한다. 그래서 왕흥지 지석을 구해 번역해 보니 왕흥지의 지석에는 둘째아들이 양자 간 것 까지 기록이 되어 있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도 기가 막힌데 중국 신하인 왕흥지의 지석을 따라 했다고 하니 황당무계하다.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너무 화려하고 아름답다. 1,448년 된 유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1,448년에 만든 벽돌은 영구적인가? 세월의 흔적이 거의 없다. 그 시절에 무덤 만들 벽돌까지 만들었다면 벽돌집은 흔해야 한다. 사람은 지속적으로 편리함을 추구하며 발전을 해 왔기 때문이다.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편리한 쪽으로 만들어 낸다.

1971년이면 우리나라가 벽돌을 만들 수 있었다. 누구의 아이디어 인지 몰라도 벽돌로 무덤을 만들고 지석과 부장품을 미리 만들어 놓고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 것인지는 그들만이 알 것이다.

무령왕릉은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있었다고 한다. 지하는 굴삭기를 팠을 것으로 보인다. 523년에는 그렇게 큰 굴을 팔 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큰 굴은 1971년이면 가능하다. 굴삭기는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중고를 수입해 쓰다가 1975년부터 국내 조립 생산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령왕릉 지석, 돌에 구멍까지 있다. 이 돌을 어떻게 깎아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