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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이른바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분노는 사람을 죽인다?
분노는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인다고? 누구를 죽이는 것인가? 분노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인가? 그럼 분노한 사람은 두 번 죽는 것인데!
사람들은 언제부터 가해자 편이었을까? 가만히 있는 사람 폭행한 가해자 편을 들어 그 폭행에 분노한 사람을 억압한다. “니가 폭행을 당했으면 당한대로 살지 어디서 분노하고 그래 분노도 하지마” 그런 태도이다.
드라마, 영화 스토리가 처음에 가해자 응징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내용이 많다. 결론은 가해자 응징자는 가해자가 되고 진짜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어버린다. 원인 제공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해자가 악인이 되어 버린다.
시비 건 사람에게 응징하면 너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어떻게 똑같은 사람이지,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시비 건 사람과 그 시비에 피해를 봐서 응징하는 사람이 왜 똑같은 사람일까?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가해자 편인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가해한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서 강한 사람 편을 드는 것인가? 그게 본능인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필자는 분노가 ‘적’을 죽인다면 신이 있다고 믿겠다. 하지만 신은 없다. 가해자는 언제나 잘 나가니까 주변 사람들까지 가해자 편을 들어 피해자를 두 번 세 번 죽이니까. 오래전 같이 교회를 다닌 권사님에게 필자가 당한 일을 이야기 하며 저주를 했더니 하나님이 안들어 준다고 한다. 그럼 가만히 있다 당한 나는 뭐가 되는 거지, 그 사람은 본능적으로 필자의 적이었던 것이다. 내편이 없다. 필자는 억울한 일 당했다고 하는 사람 외면해 본적도 그러면 안된다고 한 적도 없다.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다 해줬다. 민원이 필요하면 민원을 넣어줬다. 돌아오는 것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진심이 느껴지는지 필자는 모르겠다. 욕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같이 욕도 해줬다. 하지만 같이 욕해주니까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지가 억울하다고 해서 같이 욕해주니 뚱한 표정이었다.
사람은 하는 대로 받는 말도 거짓말이었다. 한 대로 절대로 못 받는다. 특히 선한 사람이 한 댓가는 어디서도 못 받고 오히려 나빠지기만 한다. 어려운 일 당하니 주변 사람들의 진심을 알게 되어 더 씁쓸해질 뿐이다.
억울한 일 이야기하면 용서해라, 용서를 빌지도 않는데 뭔 용서를 하라는 것이지, 잊어버려라 쉽게 말한다. 댁이 당해보고 말해라고 한다. 니가 나와 같이 똑같이 더도 덜도 말고 똑같이 당해보고 그때 가서 말해라고 한다. 지가 안당했다고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남을 생각하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나는 누가 생각해주나 나를 생각해서 묻지마 폭행을 했다는 것인가? 남도 내가 건강하고 편안할 때 생각하는 것이지 내가 이웃에 폭행당해 수갑까지 차고 벌금내라고 공포스럽게 협박당하다 결국에는 유사강간 당하고 통장도 탈탈 털렸는데, 남을 생각하라고 그 입을 찢어 버리고 싶다. 가끔 그 말이 생각나면 더 분노가 치민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국회 직원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