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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성곽)은 언제 쌓았나?
역사고고학을 공부하면 제일 많은 유적이 무덤과 산성이다. 우리나라에 산성이 곳곳에 있다. 필자의 시골에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산성이 있다고 한다. 답사를 가봤다. 처음 답사 때는 여름이라 숲이 우거져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초겨울에 재차 답사를 했다. 나뭇잎이 떨어져 산성으로 쌓은 돌들을 볼 수 있었다. 산성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돌이 사각으로 벽돌모양이다. 기계로 자른 것이었다. 돌들이 이 지역 돌도 아니었다. 문제는 돌이 새것이었다.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백제시대면 1500년 전 것인데 몇 십 년 된 것 같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 이 돌들은 채석장에서 벽돌모양으로 기계로 잘라 트럭으로 날라다 쌓은 것으로 보였다. 근처 동네 이장님께 여쭤 봤다. 6.25때 쌓은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보기에도 5~60년대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 어릴 때 어른들이 많이 모여서 제방을 쌓았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 산성을 다른 산성들과 비교를 해봤다. 다 비슷했다. 산성들을 5~60년대 쌓아놓고 허접하게 쌓은 것은 가야가 쌓은 것이라고 하고, 야무지고 예쁘게 작은 벽돌 모양으로 촘촘하게 쌓은 것은 신라시대 것이라고 한다. 전라도 충청도는 백제시대 쌓았다고 한다. 역사를 날조하고 산성까지 계산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산성으로 백제고, 신라고, 가야다. 고구려다 하려고 말이다.
한양 성곽도 마찬가지다. 60년대에 조금 쌓고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쌓고 있는 것이다. 역사사료대로 하면 한양에 인구가 많다. 연산군일기에 궁녀만 천여 명이라고 했다. 경복궁에 천여 명 살 수가 있나? 그런데 궁녀만 천여 명이다. 그 많은 인구가 밥을 해먹으려면 갈퀴나무가 많이 필요하다. 궁궐에 나무 청이 크게 있어야 한다. 현재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에 나무청의 흔적이 있는가? 나무를 해서 이고 지고 나르는데 성곽이 있으면 나무를 해서 성문을 찾아 돌아 다녀야 한다. 그것부터 상상이 안 간다. 기와집인 개량 한옥은 1960년대 유행 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은 그때 연료를 뭘 땠는지 알 수 없다. 나무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탄을 땠다면 가능하다. 시골은 기와집이라도 아궁이가 있고 나무를 해서 땠다. 서울이 그 많은 인구가 나무를 어디서 조달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해 보인다. 서울이 개발된 것은 나무가 아닌 다른 대체 연료 즉 연탄이 개발 되고 나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리건판으로 보는 신라의 성곽』을 보면 경주 남산 신성성벽이 있다. 1920년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조사단이 찍은 유리건판 사진과 2015년에 찍은 사진이 1920년 사진이 성벽이 더 오래된 것처럼 보이고 2015년 사진은 새 것처럼 보인다. 5~60년대 산성을 쌓았다 허물고는 자연적으로 허문 것처럼 보이게 한 것 같다. 1920년 사진은 나무가 없다. 신라때 쌓았고 방치해서 1920년에 발견을 했으면 나무가 우거져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2015년 촬영사진을 보면 나무들이 그렇게 굵지도 크지도 않다. 몇 십 년 밖에 안 된 나무들로 보인다. 자생나무 같다.
1920년 일본인이 찍었다는 사진은 CG로 그런 것 같다. 모델은 2015년도 사진이고 말이다. 가능성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