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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전차? 21.
PART 1 : 전차의 도입 | 문명의 충격과 의식의 변화 : 보스트위크 사진으로 본 한성 : 개항 이후 도성에 외국인 거주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개항은 특정한 항구를 열어 외국 선박의 출입을 허용하고 외국과 통상 관계를 공식화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 땅은 삼면이 바다이다. 항구는 없었다. 서양인들이 자기들 맘대로 항구를 만들고 개항했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의 추정은 처음에 부산에 신발공장을 만들었다. 배가 드나드니 부산항을 만들었다고 본다. 다음 인천에 방직공장을 만들었다. 인천에 항구를 만든 것이다. 군산항은 김제 평야 등에서 생산한 벼를 가져가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본다.
개항 이후 많은 외국인들이 한성에 정착했다고 한다. 1980년대만 해도 빈민의 눈에는 거의 띄지 않았다. 지금은 외국인이 한국인 보다 더 많은 것 같다. 지하철에도 얼굴은 한국인 같은데 말을 하면 외국말을 했다. 많은 외국인들 중에 콜브란과 보스트위크라는 외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한성전기회사의 전차 설비 마련 및 운영을 청부받아 1896년경에 이 땅에 들어왔다고 한다. 한성전기회사가 재정이 악화되어 한-미 합자회사인 한미전기회사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한국전력공사에 필자의 시골집 전기 기록은 1988년 5월 이라고 한다. 실제 필자 시골집 전기가 들어 온 것은 1975~6년이다. 그럼 1988년에 처음 이 땅에서 발전소를 만들고 전봇대를 만들어 전기를 공급한 회사가 아닐 수도 있다.
1970년대 이 땅에 들어와 전기를 가설한 회사가 혹시 망하고 한국전력공사로 넘어 간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1909년 클브란이 일본에 매도하면서 결국 회사는 사라졌다고 한다. 한성전기회사가 한-미 합자회사로 전환되었다가 일본에 매도되면서 결국은 사라졌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보스크위크는 고종의 자금을 맡은 은행을 설립하기도 하는 등 고종의 근대화 사업을 지원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자금난으로 전기회사는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넘어 갔는데 은행을 설립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에서의 보스트위크의 활동은 그의 부인에 의해서 남겨졌다고 한다. 2,000여 장에 이른 보스트위크의 사진은 후손들에 의해 한국전력공사 전기박물관으로 기증되었다고 한다.
보스트위크의 후손 기증 사진앨범 1900년 최대크기 63.5×48.2×3.2 필자는 80년대도 앨범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처음 앨범은 갖게 된 것은 교회에서 상품으로 받은 것이었다. 몇 년 전까지 소장하고 있다가 누래지고 너덜너덜 해져서 앨범을 바꾸었다. 이미지로 보는 앨범들은 현대에나 나올 법한 것들이다. 수첩 앨범으로 보인다. 보스트위크의 이미지를 보자. 사진이 선명하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쌍꺼풀이 짓다. 1900년대 언제인지 1870~1931년은 한국 체류 기간을 말하는 가? 100년도 더 된 사진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보스트위크 명함도 있다. 그 시절에 명함도 있었다고 한다. 명함은 무엇으로 찍었는가?
보스트위크는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 철도 건설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고 한다. 헨리 콜브란(1850~1922)과 함께 ‘콜브란-보스트위크 회사’를 설립하고 구한말 개발 사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경인철도 사업 때문에 한국에 들어온 이들은 주미대사 호러스 알렌의 알선을 통해 한양에 전차 부설 사업을 얻었다고 한다. 서울 시내 전기 가설권과 송도까지 경편철도 부설권, 상수도 가설권, 광산 채굴권, 은행 설립 권까지 얻었다고 한다. 인천 송도를 말하면 인천 송도는 개발 된지 몇 십 년 안 된다. 보스트위크 가문의 문장까지 있다. 콜브란이 1850년 생으로 보인다. 그럼 보스트위크는 1870년생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