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64.
서울의 전차? 86.
PART 02 : 궤도와 바퀴는 사람들의 발이 되고 : 정거장 사이의 일상과 풍경 : 전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 | 1938년 :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중편소설로 당시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고 한다. 1970년대도 지식인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필자세대와 필자 앞 세대는 공장세대다. 그 앞 세대는 농부세대라고 봐야 한다. 필자 후세대가 1970년대 이짝 저짝 태어난 사람들부터 지식인들이 많아졌고 취직도 잘되었다. 그럼 필자 세대의 배운 사람들은 취직은 더 잘되었다. 무기력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대접받으며 호화롭게 잘 살았다. 학력세탁을 해서도 잘살았다.
소설의 주인공 구보씨는 동대문행 전차를 타고 경성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이를 통해 1930년대 경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천변풍경』에서는 서울이라고 했는데 경성이라고 한다. 십 여리 길을 전차를 타고 돌아다닐 공간이 있나? 1930년대 경성이 전차가 다니고 건물들이 호화롭다. 현실은 1970년대 초가집에 함석집이었다. 1980년대 초반 필자가 본 부산은 골목은 좁고 검은 흙이었다. 뻘을 막아서 마을을 만들어서 일까? 시골은 황토흙이었는데 부산은 검은 흙이었다. 하천도 좀 다듬긴 했지만 물이 말랐고 냄새가 진동했었다. 푸세식 화장실에서 나는 냄새와 하천의 악취가 섞여 났다.
인천은 큰 담장 안에서 공장 건물이 여러 개 있었다. 주택은 보기 힘들었다. 서울 금호동인지 옥수동인지 지인 집에 방문했을 때도 언덕배기에 푸세식 화장실에 연탄불에 밥을 해먹었다. 역사 자료와 현실이 맞지 않다. 역사자료는 조선형무소 연혁사를 보면 형무소 건물도 재벌집이다. 호화로운 2층 건물이다. 『조선과 건축』이라는 책을 보면 1900년대 초중반 건물들이 지금처럼 화려하다. 구라를 처도 적당이 처야지 대놓고 사기를 친다. 가짜자료 만들어서 말이다. 가짜자료로 교육받은 학생들은 그것이 가짜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1922년 김구는 서양인이다. 김구 기념관과 경교장에 떡하니 전시를 해놔도 누구하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나 보다. 이승만이 1903년에 감옥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사진을 방송국에서도 써먹는다. 감옥에서 어떻게 사진을 찍나? 1903년에 미국도 카메라가 없었을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국립중앙도서관은 홈페이지를 리뉴얼 했나 보다. 원문보기가 사라졌다. 감추는 자가 범인인가? 일제강점기 책들 가짜라고 그때 그런 책 만들 수 없다고 했더니 그때 만든 책이 많아서 진짜라고 우겼다. 필자는 많아서 아니라고 했다. 전기도 없었다. 인쇄기술도 없었다. 뭘로 책을 만들었을까.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는 인쇄기는 1970년이다. 그때 인쇄기는 발동기로 돌렸을 것으로 판단된다. 노량진에 있던 국정교과서 건물은 언제 생겼을까? 1970년대 초반에 그 건물이 생겼고 교과서를 인쇄했다면 발동기로 돌렸을 것으로 본다. 그전에 국민 학교에서 가르친 교재는 어디서 만들었을까? 필자는 미국에서 만들어 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땅에서 교재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은 소규모라도 1970년대 초반으로 본다.
구보씨가 전차로는 조선은행이나 경성우체국에서 출발해 황금정을 지나 종로네거리에서 화신백화점으러 거쳐 동대문으로 갔다. 종로네거리에서 동대문까지는 직선이다. 도보로는 경성역에서 남대문으로 해서 동대문까지 걸어 다녔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보보다 전차길이 더 짧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소설이다. 소설을 쓰고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