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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100장

100-29 경교장 김구

김구 경교장

 

   경교장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평안북도의 수많은 금광 중 삼성금광(金鑛)으로 벼락부자가 된 친일 기업인 최창학의 개인 소유 자택이었다. 당대에 문화주택의 붐에 힘입어 야심차게 건설했지만 최창학 본인은 바로 뒤에 있는 한옥에 살았다.

해방 후인 1945년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귀국하게 되면서 분위기를 파악한 최창학이 잽싸게 헌납하여 김구와 임정요인들의 거처 겸 김구의 개인 사저가 되었다고 한다.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 찾아온 안두희의 총에 맞아 숨진 후 다시 소유권이 최창학에서 돌아왔다. 최창학은 금광으로 떼부자가 되었고, 경교장이 최창학에게 돌아 갔는데, 검색해보면 흔적이 없다. 친일인명 사전에 기록되었다는 것만 있다. 부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교장을 답사해 본 결과 사무실용으로 지어진 집이지 가정집으로는 불가능 해보였다. 최신식 집이었다. 지하에서 요리를 해서 엘리베이터로 지상 1층으로 올려 삐까 뻔쩍한 타원형 긴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완전 서양식이다.

김구가 개인 사저로 사용했다는 2층은 계단을 올라가 왼쪽은 사무실용으로 꾸몄고 벽난로가 모양이 있으나 안에를 살펴보니 연통이 없었다. 수도선인지 가 있는 것으로 봐서 세면대 같기도 했다. 가볍게 손 씻는 곳 말이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김구가 생활하는 방이 있고 복도인지 베란다인지가 있다. 여기서는 베란다라고 하자. 베란다에 책상을 놓고 거기 앉아 있다가 안두희의 총탄에 맞았다고 한다.

   경교장에서 설명하는 안두희가 총 쏜자리는 사선이다. 방문을 두 개를 통과해야 한다. 6월이라 문을 다 열어 놨다고 보면 가능하다. KBS 방송인지 유튜브인지 영상에서는 김구 바로 앞에서 총을 쐈다고 한다.

   유리창에 총알이 통과했다고 흔적을 남겨 뒀다. 총알이 유리창을 통과했으면 유리창은 아작이 나야 한다. 예전 우리 창들은 돌에 맞으면 와장창 깨졌다. 그런데 총알구멍이 있고 금만 몇 줄 갔다. 피도 안튀었는지 깨끗하다. 8~90십년대만 해도 유리가 얇았다. 그래서 작은 충격에도 유리가 깨졌다. 필자가 80년대 공장 다닐 때 공장 문이 아래는 나무고 위는 유리로 되어 있었다. 양손에 물건을 들고 팔꿈치로 문을 닫는다고 밀었는데 유리가 와장창 깨졌다. 팔꿈치도 유리에 베었었다.

  김구 개인 방은 다다비로 되어 있었고, 난방 시설이 없었다. 어떻게 겨울에 살았을까 싶다.

  최창학에서 돌아간 경고장이 1949년 11월에 주한 중화민국 대사관이 인수하여 초대 대사 사오위린이 관저로 빌려 쓰다가 1950년 6.25 전쟁 발발하면서 철수 했다고 한다. 경교장을 대사관 건물로 썼다는 건지 대사관저로 썼다는 건지. 관저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대사관 건물로 지었다가 김구 암살 영화 찍는 세트장으로 쓰인 것인지, 김구 암살 영화 세트장으로 지은 것인지, 영화 세트장으로 지었다는 것에 필자는 무게를 둔다.

경교장 필자가 답사시 찍은 사진
경고장 나무위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