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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백장. 20

[100-38] 양

100-38

 

 

산업혁명 중 1차 산업혁명을 보면 영국 내 산업 혁명의 전개를 나타낸 지도가 있다. 섬유 산업 지역(양모)가 있다. 양모 또는 양털(羊毛, Wool)는 양의 털로 만든 섬유다. 울은 뜨게실로 많이 유통되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양털() 옷이 등장했다. 좀 오래전에 백화점에 양모로 많은 옷들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길거리에서도 양모로 많은 가볍고 부드러운 옷을 판다. 필자도 올 초겨울에 하나 장만했다. 저렴하고 가볍고 부드럽고 따뜻하다. 외투가 만 원도 안했다. 날씨가 더 추워지니 입지는 못하고 있다.

나무위키에 한국사에서도 신라에서 양모를 이용해 일종의 카페트인 정창원 신라 양탄자를 만들고 수출했을 정도로 고대부터 애용해 온 소재라고 한다. 필자는 전북 남원이 고향이다. 운봉에 양 목장이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면양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으로 본다. 면양은 개량종이라고 본다. 실제 자연에서 면양은 살아남지 못한다. 털갈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털이 계속 자라서 떡이지고 파묻힌다. 주기적으로 깎아줘야 면양은 생존을 한다. 신라시대에 우리나라에 면양이 있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기록은 현대에 썼다고 본다.

제주일보의 문헌으로 본 양의 역사기사가 있다. 2003년도 기사이다. 우리나라 양에 대한 기록은 삼한(三韓)시대부터 나온다고 한다. 삼한(三韓)은 마한 진한 변한이다. 중국 후한(後漢. AD 25~219)시대에 양에 대한 기록이 있고 이 땅에서 육포를 먹었다고 한다. 여기서 양은 면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본서기 에도 양이 나온다. 앞서 신라에서 양으로 카펫을 만들었다는 것은 면양이 확실하다. 고려사에서 양이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충렬왕 때는 원나라 쿠빌라이다 죽자 왕이 양 10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양 목장 돼지목장 염소 동산, 사슴 목장 등이 있었다고 한다.

제주에서 면양이 산업으로 육성 된 것은 1960년대라고 한다. 뉴질랜드에서 번식용 면양을 도입했고, 1970년대 초 2800마리를 키울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 이시돌 목장의 양 300여 마리가 강원도 대간령으로 팔려갔다고 한다. 제주도 면양 목장은 정확하게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자꾸 무언가가 확대 된다. 제주도 양 목장은 생각도 못했다. 제주도는 말목장도 있다. 말 목장은 언제 생겼는지도 추적해 볼 일이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에는 19711028일 운봉읍 바래봉에 면양 시범 목장이 운영되었으며, 1972년 호주산 면양 1,000마리를 시작으로 19762,717마리를 들여왔다고 한다. 1988년에 운봉의 면양목장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1973년 수도권인구분산 정책으로 한국조폐공사를 대전으로 이사 시켰다는 것은 2000년대 노무현 정부 때 수도권 분산 정책 이야기로 본다. 서산문화원의 한우(韓牛) 개량의 메카 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2. 삼화축산주식회사 설립 타. 농어민후계자 육성의 “1970년대 경제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이농현상이 심화되어 농업 인력이 부족하고 노령화되어 농업의 승계가 어려운 실정이었다.”는 현재의 이야기이다. 이로 보아 현재에 쓰고 연대만 신라 시대, 고려 시대, 70년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릿고개나 민둥산은 허구이고, 나머지는 현대의 배경에 옛날 연대를 갖다 붙인 것이다. 고조선, 삼한, 삼국,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6.25는 어떤 모티브에서 탄생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