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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백장. 20

[100-47] 윤심덕 3.

100-47

 

윤심덕 3.

 

앞장에서 보지 못한 윤심덕의 매일신보192054일자 원문기사 東京音樂校入學된 됴션두부인을 보자. “사월의 신학년부터 동경음악학교에 入學許可를 엇은 두명의 됴션부인이 있ᄂᆞᆫᄃᆡ 그즁ᄒᆞᆫ사람은 총독부에셔 츄쳔ᄒᆞᆫ관비ᄉᆡᆼ 官費生ᄋᆡᄃᆡ일흠은 윤심덕尹心德이요. 평양의 목ᄉᆞ 윤셕호씨(平壤牧師尹錫浩氏영랑으로 동디녀ᄌᆞ고등 보통학교에셔 경성여ᄌᆞ 고등보통학교의 사법과를 졸업ᄒᆞ고 강원도 춘쳔공립보통학교江原道春川公立普通學校에셔 교편을 잡고 잇던바 금회션발選拔되야 경셩에셔 시험에합격 되야 갑종 사법학교甲種師範學校에 힙학이되얏더라, 됴션복을 착ᄒᆞᆫ윤양을 음악학교 긔슉사로방문ᄒᆞᆫ즉 칠월의시험 ᄭᆞ지열심으로 공부한다 ㅎ면셔깃분 ᄋퟅᄉᆡᆨ으로말ᄒᆞ며 그리 ᄒᆞ고 ᄯᅩ피아노ᄂᆞᆫ 어렷슬 ᄯᆡᆸ터집에 잇셧슴으로 별노셔ᄉᆡᆼ에게 ᄇᆡ호지아니ᄒᆞ고마암에즐기여련습ᄒᆞ엿다ᄒᆞ며동시동교에 립학된 한긔쥬韓埼柱(ᄋᆢ)라ᄂᆞᆫ부인은 수년젼에 상경ᄒᆞ야일교분교장』『一檜分敎場에 다니다가 일본융화회리사쳔상용씨日本融會理事川上勇氏의진혁ᄒᆞᆫ 바로립학되얏다더라

기사 내용을 보면 윤심덕은 성악이든 피아노든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배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피아노는 독학을 하고 성악은 일본 음악학교에서 3년간 배워서 발성을 틔워서 유명한 성악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에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고 한다. 피아노는 수입을 해서 들였나? 기사 내용을 보면 현대 가정집이다. 1990년대나 2000년대 어느 목사의 가정집을 묘사하고 년대는 1920년이라고 쓴 것으로 보인다.

성악은 개인적으로 배워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서 성인이 되어서 배워도 발성이 틔여서 남들이 감동할 만큼 멋진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필자가 교회를 오래 다녔다. 성가대에서 봉사를 오래 했다. 성가대도 성악이다. 아마추어 성악이다. 성악은 사람의 목소리로 나타내는 음악을 총칭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로 전문적으로 노래를 하는 사람이 성악가이다. 대중가요 포함 모든 노래 부르는 사람은 성악가이다. 그런데 특별한 발성법을 개발해 노래하는 사람들을 보고 성악가라고 하는 관습이 생겼다.

일제 강점기도 없었을 뿐더러 신문을 만들 종이도 생산을 할 수 없는 시기이다. 1920년대는 매일신보1910년부터 기사가 있다고 한다. 우리역사넷의 일제 강점기의 언론과 광고를 보면 경성일보사 건물이 3층 건물이다. 동아일보 사옥은 1926년 지었다고 한다. 지금 일민미술관으로 보인다. 1926년에 지을 수 없는 건물이다. 동아일보에 오래된 신문지에 대해서 문의를 한 적이 있다. 전에는 신문지를 전시를 했었는데 현재는 안한다고 한다. 왜 안하냐고 하니 모른다고 했다.

192611월에 조선 총독부가 서울 중구 정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을 설립했다고 한다. 건물은 현대식 3층 건물로 보이고 철탑이 큰 것이 두 개 보인다. 경성방송국이 우리말 방송과 일본말 방송을 섞어 내보냈다고 한다. 매일신보192685일자 기사에 윤심덕이 사망기사가 있다. 현해탄에서 자살했다는데 바로 기사가 났다. 聲樂家 尹心悳孃 情夫玄海投身情死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다. 「◇사진설명 : 현해에 몸을 던저서 정사를 한 윤심덕양과 처자를 두고 윤양과 함께 정사를 한 수산 김우진씨이 사진의 윤심덕은 후덕한 결혼 생활 오래한 부인의 모습이다. 머리는 짧은 머리에 미용실에서 후까시 넣어서 손질한 머리다. 윤심덕이도 사진을 모아보니 여러 명이다.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왼쪽 상단 남녀 사진이 윤심덕과 김우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