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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백장. 20

[100-48] 소 3(성이시돌 목장).

100-48

 

3(성이시돌 목장).

 

19544월 콜로반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제주도에 온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한국명 임피제 신부가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드넓은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하여 196111월 성이시도르의 이름을 따서 지은 중앙실습목장이라고 한다.

19644월에 성 이시돌 배합사료공장(현 이시돌 사료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였고 19694월에 뉴질랜드에서 면양과 종돈을 들여왔다고 한다. 몇 마리를 들여왔는지는 없다. 19699월에는 개척단지 조성사업자금 및 기술지원을 시작하였으며 19722월 호주에서 농가 종축 개량용으로 소 968두를 들여왔다고 한다. 19733월 양돈 농가 약 200세대가 돈협업 농가를 조직하였고, 6월에 호주에서 육용 종유 980두와 종돈 39두를 도입하였고 1976년에 12월에 개척농가 조성 사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임피제()는 많이 들어 본 것 같다. 그게 어느 지역 재를 말하는 줄 알았는데 외국인 이름이었나? 목장 이름이 임피제가 아니고 성이시돌일까? 여기서부터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1961년에 중앙실습목장을 만들었다고? 그 시절에 뭔 실습목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1964년에 배합 사료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료공장 언제부터 생겼는가? 70년대도 사료공장은 없었다. 70년대 집성촌의 모습은 사료를 줄 만큼 가축을 많이 기르지 않았다. 돼지는 집집마다 길렀다. 잔반처리와 사람 똥을 먹었다. 통세라고 돼지 마구 위에 똥누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 똥을 누면 돼지가 아래서 받아먹었다.

소의 밥은 풀이다. 보통 낮에는 밖에 내놔 알아서 풀을 뜯어 먹었고, 풀을 말려 소죽을 끓여서 먹였다. 소밥은 엄청 약밥이었다. 각종 풀을 베다 말려 가마솥에 끓여서 소에게 먹였다. 한약의 재료도 풀이다. 돼지는 사람이 먹고 남은 잔반을 먹었다. 바께스 한통이 모아 돼지 구세통에 부어주면 엄청 잘 먹었다. 70년대는 쓰레기가 없었다. 마지막에는 거름이 되어 논이나 밭으로 갔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순환농법이다. 1973년에 200세대 농가가 돈협업을 조직했다는 것도 신뢰하기 힘들다. 몇 십 년 후의 일일 것으로 생각된다.

서산의 삼화목장과 대관령의 삼양목장 제주도의 이시돌 목장 그리고 남원 운봉의 양목장을 보면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삼화목장이 그 시절에 소로 논밭을 가는데 소를 6백여 두나 사들였을까? 70년대 사정으로 봐도 이해하기 힘들다. 1975년에 소 900여 마리가 겨울을 무사히 났고 농사의 소득증대를 위해서 한우를 분양하거나 위탁 사육하게 했다고 한다. 거 참 이해하기 힘들다. 삼양목장은 1974년에 2천두를 돌파했다는데 그게 어떻게 돌파 했는지는 말이 없다. 남원 운봉의 면 목장은 1972년에 천 마리로 시작했다고 그나마 기록이 자세하다. 성이시돌 목장도 1972년에 호주에서 968두의 개량용 소를 들여왔다고 한다. 개량용 소는 황소인가? 아닌가?

70년대 초반에 소를 들여와서 서산과 대관령에서 팔기 전까지 잠시 보관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생각보다 안 팔리니 농가에 위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완주군 고산면에 소 도축장이 있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있었다가 언제 사라졌는지 문의했지만 아직 답변이 없다. 돼지는 모르겠고 소, , , 고양이는 70년대 초반에 들어온 수입품들 같다. 우리 선조들은 닭은 본적이 없고 꿩을 잡아서 먹었을 것으로 본다. 70년대는 산에 꿩이 흔했다. 밭에 가다 보면 아무데서나 꿩이 튀어 나와서 놀라곤 했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힘들게 꿩 잡지 말고 닭 길러서 잡아먹어라 라는 의미의 말로 해석된다.

이 건물을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초창기 마구를 말하는지 벽돌에 노란색을 칠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