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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백장. 20

[100-84] 서울의 전차? 9.

100-84
 
서울의 전차? 9.
 
PART 1 : 전차의 도입 | 문명의 충격과 의식의 변화 : 근대화에 대한 적응 : 전차 사건과 한국인 폭동 관련 신문기사 THE ELECTRIC RAILWAY IN COREA - Another Chapter in the First Street Railway in Seoul. 《The Railway Age》의 1899년 8월 4일자 기사라고 한다. 콜브란의 서신에 대해 보도한 같은 해 7월 21일과 22일자 기사에 이은 후속 기사로 1899년 6월 6일자 편지에 동봉된 사진은 네 점이 차례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일상적인 전차 모습과 폭동 모습, 폭동후의 모습의 사진을 미국에 보냈다는 것이다. 신문 용지는 A4용지로 보인다. 두 단으로 나누어 기사를 작성했다. 컴퓨터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1899년에 컴퓨터가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1899년 관보(官報)를 보자. 6월 1일자 관보 중, 5월 26일에 전차가 어린아이를 치어 죽인 사고와 관련하여 조정에서 구휼금을 지급하는 한편, 전차 운전 시 사람들이 철길로 들어오는지 여부를 반드시 살피라는 고종의 명이 적혀 있다고 하다. 회사 사장의 처벌 및 농상공부 대신 민영기의 견책을 시행한 대용도 담겼다고 한다. 관보가 표지는 옛날 족보 표지처럼 실로 묶었지만 안은 양지로 보인다. 미국 발행 신문도 발행이 어려워 보이는 시절이다. 관보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제지 생산을 59년으로 보았지만 전기 역사로 보았을 때 59년에 어떻게 파지로 백지를 만들어 냈는지 추측이 불가능하다.
외부래문 제3책이라는 것이 있다. 1899년 6월 3일 콜브란이 전차 사고에 대해 외부에 접수한 문서 초록으로 전차 운행 중 사고는 불가피한 것이며 전차 회사에 대한 사람들의 항의에 대해 정부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차 전면에 방범구를 설치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철 사고 날조하고 그것으로 스크린 도어 설치한 것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다. 방범구가 설치된 전차라고 하는 이미지가 있다. 뭐가 방범구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앞에 것을 방범구라고 하는 것인가? 위에 손잡이 달린 난간을 방범구라고 하는 것인가?
누구나 탈 수 있는 차 : “다섯 닢만 있다면 누구든 전차를 타고 한성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차비를 내면 평민도 양반과 함께 일등석에 탈 수 있었고, 양반일지라도 차비가 없다면 전차를 탈 수 없었다. 전차는 반상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간의 공간 구별도 서서히 무너뜨렸다고 한다. ‘여성도 남성과 함께 전차를 탈 수 있다’고 홍보를 했다고 한다. 『조선견문기』 호러스 알렌, 1908년. 미국 공사 알렌이 쓴 조선에 대한 책이다. 전차에 대한 서술 중, 양반이라 할지라도 전차 시간에 맞추어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전차는 반상 간의 계급이 필요 없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차였다고 한다.
『알렌의 일기』 책에 알렌의 소개를 보자. 알렌은 우리가 알기로는 선교사로 알고 있다. 이 책에서는 駐韓美國 全權公使 알렌 1897. 재임 : 1897. 7. 17 ~ 1905. 3. 29. 알렌은 1884년 9월에 長老敎 醫療宣敎師로 내한한 이래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1890~1893), 임시대기공사(1893~1897), 전권공사(1897~1905)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外交를 주도했다. 알렌의 別莊(仁川市 崇義洞 1070, 1890年代. 별장 사진은 2층 건물에 외장은 빨간 벽돌 건물로 보인다. 1층 발코니와 2층 창이 여러 개에 코너를 둥근형으로 지어 건축미를 화려하게 뽐내고 있다. 1905년에 주한미국공사에서 해임되어 본국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의료선교사인데 한국공사를 하다 해고되니 미국을 돌아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