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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100장

100-10 경복궁은 "무덤이 있는 집"이다

100-10

 

경복궁은 『무덤이 있는 집』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도성대지도에는 경복궁에 무덤이 두기가 있다. 지금의 경복궁보다 직사각형으로 길게 울타리가 있다. 중앙 부분에 사각형의 울타리가 있다. 무덤이 두기 있으며 입구는 동쪽이다. 양 무덤을 안쪽으로 무덤 동향에 박석 같은 것이 보이고 다음에 입구가 있다.

   지금의 광화문 자리에 한자로 경복궁이라고 쓰여져 있다. 광화문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서울역사 박물관은 도성대지도로 두 번의 도록을 냈다.

   첫 번째 도록은 2004년이다. 도성대지도-읽기 10페이지 하단에 무덤을 확대해서 실었다. 하지만 무덤이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④ 궁궐에 “궁궐 내부의 모습은 대표적인 전각의 큼직한 기와지붕을 그려 넣음으로써 갈음하였다. 가장 큰 경복궁은 경회루의 석주와 정문인 광화문의 석축과 석주만이 남아 아직 재건되지 않은 상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로 쓰여 있다. 무덤을 확대 해 놓고 무덤이라고 하지 않고 경회루 석주라고 한다. 경복궁을 광화문이라고 썼다. 입구에는 경복궁이라고 쓰여져 있다. 분명 무덤을 확대 했는데 무덤을 무덤이라고 하지 못한 것이다. 이유가 뭘까? 우리나라는 기존 역사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면 학교에서 퇴출당한다. 필자가 대학원에서 우리역사연구 잘못되었다고 했고, 연구 계획서 냈다가 “기존연구와 배치 되서 부적합하다”고 쫓겨났다. 도성대지도 2004년 도록 만든 사람도 위협을 당한 것으로 추측한다. 학교에서 학생도 쫓아내는데 박물관에서 저들 말대로 안하면 밥줄이 끊기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2020년 도록 재발간 하면서 무덤은 확대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때 정국인 경복궁이 불탔는데 방치했다가 275년 후인 고종 4년에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고 한다. 정궁을 275년이나 방치하고 임금님은 창덕궁 덕수궁을 전전했다고 한다.

   경복궁이나 덕수궁을 보면 복원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 수 없다. 우리나라는 구들에 아궁이가 있고 나무를 때서 난방 취사를 했다. 그래서 부엌이 컸다. 때로는 정제 때로는 나무청이라고 부른다. 갈퀴나무를 몇 동씩 쟁여 놓고 쓴다. 그래봐야 며칠 못쓰지만 그렇게 쟁여 놓아야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다. 밖에 비가림 장치 없이 쌓아 놓으면 비나 눈을 맞으면 연료로 쓸 수 없다. 물에 젖어서 불이 붙지 않는다.

   궁궐은 사람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나무청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경복궁 덕수궁에 나무청은 없다. 나무를 어디에다 쟁여두고 사용하였나? 필요할 때마다 성 밖에서 이고지고 날랐나? 성안 사람들은 나무를 어떻게 조달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사대문 밖에서 나무를 해다 날라도 이고지고 성문을 찾아 많은 발걸음을 했을 것이다. 7-80년대도 시골은 나무를 해서 밥을 해먹었고, 나무는 사서 쓰지 않았다. 직접 산에 가서 갈퀴로 긁어모아 동을 만들어 묶어서 여자들은 머리에 이어서 날랐다. 사대문 안에 사람이 많이 살았다면 나무를 이고지고 다니는 사람이 줄을 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옛 사진들을 보면 소등에 판자 같은 것을 실어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을 나무해서 나르는 것으로 표현한 것 같다. 갈퀴나무 해서 이고지고 나르는 사진은 한 컷도 안 보인다.

   우리 생활상을 모르고 대충 세트장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景福宮)은 한자를 풀이해보면 무덤이 있는 집, 제사지내는 집으로 풀이 된다.

 

도성대지도의 경복궁